하자르의 주거형태 — 유목민의 천막에서 벽돌 요새까지, 이 제국은 어떻게’집’을 바꿔 나갔을까?

초원의 기마민족이 세운 제국이 거대한 벽돌 도시를 갖게 되기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하자르 카간국(약650~969년)의 주거 형태는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유목에서 정착으로 이행하는 한 문명의 전환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하자르의 주거형태를 따라가면,초원 제국이 어떻게 실크로드의 교역 강국으로 탈바꿈했는지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거형태가 발전함은 그 나라가 그만큼 부유해지고 물자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초원의 천막부터 벽돌 요새까지 진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글도 한번 보시고 하자르 시대의 사람들의 발전에 대해 생각 해보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원형 천막에서 시작된 삶 — 유르트, 초원의 원형 주거

하자르인의 가장 원초적인 주거 형태는 유르트(yurt), 즉 이동식 원형 천막이었습니다. 튀르크계 유목민의 공통된 주거 방식이었고, 하자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무 격자로 벽체를 세우고, 그 위에 펠트(양모 압축직물)를 덮어 바람과 추위를 막는 구조입니다. 조립과 해체에 30분에서 3시간이면 충분했고, 목축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 생활에 최적화된 주거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자르인들이 완전한 유목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10세기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자르인들은 겨울에는 도시와 마을에 머물다가 봄이 오면 천막을 꾸려 양떼와 소떼를 이끌고 스텝(초원)으로 나가거나, 자신들의 밭이나 포도농장 근처에 임시 거처를 차렸습니다. 한 해의 절반은 정착민, 나머지 절반은 유목민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반유목(semi-nomadic)’ 생활 패턴은 주거 형태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원형에서 사각형으로 — 정착이 바꾼 집의 모양

소련 시기 고고학 발굴은 하자르인의 주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자르 거주지 곳곳에서 원형 구조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유르트의 바닥 흔적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돔 형태의 이동식 천막이 고정적 주거 공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합니다. 유르트를 매번 해체하는 대신, 같은 자리에 반영구적으로 고정해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원형 주거는 직사각형 건물로 대체됩니다.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직사각형 건물들은 원형 주거보다 더 후대에 속합니다. 원에서 사각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형태 변화가 아닙니다. 사각형 건물은 벽을 공유하며 이웃 건물과 붙여 지을 수 있고, 방을 추가하기도 쉽습니다. 이는 고정된 토지 위에서 가족 규모가 커지고, 상업 활동이 늘어나는 정착 사회의 필요를 반영합니다.

이 과도기적 주거 형태는 하자르가 단순한 유목 전사 부족에서 농경과 교역을 겸하는 준정착 사회로 이행하고 있었음을 건축적으로 증명합니다.


수도 이틸(Atil) —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 다문화 도시

하자르 주거 형태의 최종 진화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수도 이틸입니다. 볼가 강 하구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카스피해로 향하는 수로를 장악하고 실크로드 교역의 핵심 거점이 된 곳입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이틸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서쪽에는 카간과 행정 관료들이 거주하는 왕궁 구역이 있었고, 동쪽에는 상인과 일반 주민이 사는 상업 구역이 펼쳐져 있었으며, 강 위의 섬에는 카간의 궁전이 따로 자리 잡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특히 상업 구역에서는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교도 상인들이 각각의 종교별로 따로 거주하는 구역이 마련되어 있었고, 각 종교 공동체마다 자체 재판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다문화 자치구’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2008년 아스트라한 국립대학의 드미트리 바실리예프 교수팀은 볼가 삼각주의 사모스델카 유적에서 9~10세기 문화층을 발굴했습니다. 여기서 삼각형 형태의 석회암 벽돌 요새가 확인되었고, 요새 안에서는 유르트를 닮은 원형 가옥의 흔적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벽돌 요새 안에 유르트 형 주거가 공존하는 이 발굴 결과는, 하자르 사회에서 유목적 전통과 정착 도시 문명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음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카간만 허용된 벽돌 — 건축 재료가 말해주는 권력 구조

하자르의 주거 형태에서 가장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는 건축 재료에 대한 규제입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하자르 카간은 벽돌 건물에 대한 독점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반 주민은 벽돌로 집을 지을 수 없었고, 오직 카간(또는 왕실)만이 소성 벽돌을 사용한 건축을 허용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 규제가 아니라, 권력의 가시적 표현이었습니다. 펠트와 나무로 된 천막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벽돌 궁전은, 누가 이 도시의 주인인지를 건축적으로 선언하는 장치였습니다. 비잔티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돈강 유역에 건설한 요새 도시 사르켈(Sarkel)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르켈은 소성 벽돌로 쌓은 견고한 성채로, 하자르의 서쪽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사모스델카 발굴에서도 벽돌과 벽돌 파편이 거의 모든 문화층에서 발견되었지만, 일반 가옥이 아닌 요새와 대형 구조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기록 속의 ‘카간의 벽돌 독점’이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는 뜻입니다.


일상의 흔적들 — 발굴이 보여준 하자르 가정의 실체

주거 형태를 넘어서, 하자르인들의 집 안에서는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요? 사모스델카를 비롯한 여러 발굴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의외로 풍요로운 일상을 보여줍니다.

가옥 기초부에서 호박과 구리 장신구, 유리 팔찌와 구슬, 중앙아시아 양식의 도자기 파편이 나왔습니다. 음식 잔해로는 기장(조), 수박, 복숭아, 자두의 흔적이 확인되었고, 소고기와 생선도 주식이었습니다. 도공, 대장장이, 유리 공예가 같은 전문 장인 집단이 도시 안에 거주하며 활동했다는 증거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유물 구성은 하자르의 가정이 단순한 유목 천막의 내부가 아니라, 교역망을 통해 유입된 다양한 물산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정착 도시 가정의 모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비잔티움에서 온 유리 램프, 북아프리카에서 온 향유 용기, 유럽에서 온 무기류까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하자르의 가정은 유라시아 교역망의 축소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리 — 천막에서 요새까지, 집은 문명의 거울이었다

하자르의 주거 형태는 유르트(이동식 천막)에서 출발하여, 반영구적 원형 가옥, 직사각형 정착 건물, 그리고 벽돌 요새와 다구역 도시로 진화했습니다. 이 변화는 유목에서 반유목, 다시 정착 교역 사회로의 전환을 건축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카간만이 벽돌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독특한 규제는, 건축 재료 자체가 권력의 표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종교의 상인들이 종교별 구역에 따로 거주한 수도 이틸의 구조는 하자르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을 압축합니다. 하자르의 ‘집’을 보면, 그들의 역사가 보입니다.


FAQ

Q1. 하자르인들은 완전한 유목민이었나요?

아닙니다. 하자르인들은 ‘반유목(semi-nomadic)’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겨울에는 도시와 마을에 정착해 생활하다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가축을 이끌고 초원으로 나가거나 경작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습니다. 밀과 수수를 경작하고 포도농장도 운영했다는 기록이 있어, 순수 유목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Q2. 이틸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나요?

아직 학계에서 확정적으로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러시아 아스트라한 인근의 사모스델카 유적으로, 9~10세기 문화층에서 삼각형 벽돌 요새와 유르트형 가옥이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하자르어 비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최종 확인에는 추가 발굴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Q3. 카간만 벽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그렇게 전해집니다. 고고학 발굴에서도 벽돌 사용이 주로 요새와 대형 건축물에 집중되어 있고, 일반 가옥은 목재·펠트·흙벽돌 등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기록의 신빙성을 뒷받침하지만, 과연 법적 금지였는지 아니면 경제적 제약에 의한 결과인지는 여전히 논의 중입니다.

Q4. 하자르의 요새 도시 사르켈은 어떻게 건설되었나요?

사르켈은 약 840년경 비잔티움 제국 건축가 페트로나스 카마테로스의 기술 지원을 받아 돈강 유역에 건설되었습니다. 소성 벽돌을 사용한 견고한 성채로, 하자르의 서쪽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하자르 고유의 유목 건축 전통과 비잔티움의 석조 건축 기술이 결합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Q5. 하자르의 주거 형태는 다른 튀르크 유목국가와 어떻게 다른가요?

대부분의 튀르크 유목국가가 유르트 중심의 주거를 오래 유지한 반면, 하자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도시 정착 생활로 전환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실크로드 교역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비잔티움의 건축 기술까지 도입하여 벽돌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유목 전통과 정착 도시 문명이 공존하는 ‘이중 구조’는 하자르만의 특징적인 주거 패턴이라 할 수 있습니다.

Q1. 하자르인들은 완전한 유목민이었나요?

아닙니다. 하자르인들은 ‘반유목(semi-nomadic)’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겨울에는 도시와 마을에 정착해 생활하다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가축을 이끌고 초원으로 나가거나 경작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습니다. 밀과 수수를 경작하고 포도농장도 운영했다는 기록이 있어, 순수 유목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Q2. 이틸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나요?

아직 학계에서 확정적으로 합의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러시아 아스트라한 인근의 사모스델카 유적으로, 9~10세기 문화층에서 삼각형 벽돌 요새와 유르트형 가옥이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하자르어 비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최종 확인에는 추가 발굴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Q3. 카간만 벽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그렇게 전해집니다. 고고학 발굴에서도 벽돌 사용이 주로 요새와 대형 건축물에 집중되어 있고, 일반 가옥은 목재·펠트·흙벽돌 등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기록의 신빙성을 뒷받침하지만, 과연 법적 금지였는지 아니면 경제적 제약에 의한 결과인지는 여전히 논의 중입니다.

Q4. 하자르의 요새 도시 사르켈은 어떻게 건설되었나요?

사르켈은 약 840년경 비잔티움 제국 건축가 페트로나스 카마테로스의 기술 지원을 받아 돈강 유역에 건설되었습니다. 소성 벽돌을 사용한 견고한 성채로, 하자르의 서쪽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하자르 고유의 유목 건축 전통과 비잔티움의 석조 건축 기술이 결합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Q5. 하자르의 주거 형태는 다른 튀르크 유목국가와 어떻게 다른가요?

대부분의 튀르크 유목국가가 유르트 중심의 주거를 오래 유지한 반면, 하자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도시 정착 생활로 전환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실크로드 교역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비잔티움의 건축 기술까지 도입하여 벽돌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유목 전통과 정착 도시 문명이 공존하는 ‘이중 구조’는 하자르만의 특징적인 주거 패턴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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