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귀족의 비밀 ─ 카간은 왜 비단 끈에 목이 졸렸을까?

하자르 귀족과 일반인의 삶은 같은 카간국 안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한쪽은 비단으로 둘러싸인 천막에서 다중 종교 사회를 다스렸고, 다른 한쪽은 볼가강 변에서 가축을 몰거나 카라반을 따라 모피와 노예를 운반하며 생계를 이었지요.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를 호령했던 이 튀르크계 유목 제국이 두 계급을 어떻게 만들고 운영했는지, 한 걸음씩 들여다봅니다. 계급은 지배층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만들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것을 설계하고 실행하였는지 보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것에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번 글에서는 하자르 귀족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명의 왕 — 하자르 귀족 권력의 가장 기묘한 구조

하자르 귀족 사회를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두 명의 왕’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 군주제(diarchy)입니다.

명목상의 최고 통치자는 카간(Khagan)이었습니다. 그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하늘과 인간을 잇는 사제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상의 정치와 군사는 카간이 아니라 카간-베크(Khagan-Bek), 줄여서 베크라고 불리는 두 번째 왕이 맡았습니다. 아랍 지리학자 알 이스타흐리는 이 구조를 직접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카간은 거의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베크가 군대 지휘, 외교, 세금 징수 등 실무를 모두 처리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카간의 즉위 의식입니다. 새로운 카간이 즉위할 때 신하들은 그를 비단 끈으로 거의 목 졸라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몇 년간 다스리고 싶은가?”를 물었고, 카간이 말한 햇수가 곧 그의 통치 기한이 되었습니다. 그 기한이 다하면 신하들이 카간을 의례적으로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도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모든 카간이 정말 살해되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고, 10세기 카간 요셉의 편지에는 이런 풍습이 언급되지 않아 후기에는 사라진 관습일 가능성도 큽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의례 자체가 하자르 귀족 사회에서 카간을 ‘평범한 사람’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위치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귀족 계급의 구체적 모습 —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

하자르 귀족 사회를 들여다보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분이 나옵니다. 알 이스타흐리는 하자르인을 ‘백 하자르(Ak Khazars)’와 ‘흑 하자르(Kara Khazars)’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백 하자르는 붉은 머리에 흰 피부, 푸른 눈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흑 하자르는 피부색이 인도인과 비슷하다고 묘사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한 외모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차이로 해석합니다. 즉 백 하자르가 지배 계급이고, 흑 하azars는 피지배 계급에 가까웠을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귀족층은 뚜렷한 위계를 갖췄습니다. 베크 아래에는 군 지휘관에 해당하는 타르칸(Tarkhan)들이 있었고, 변경 요새와 도시는 투둔(Tudun)이라는 행정관이 다스렸습니다. 마자르족 같은 큰 소수민족은 켄데르-카간(Kender-Khagan)이라는 별도의 부왕이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단일한 명령 체계가 아니라, 종족별·기능별로 권력을 나눠 갖는 모자이크 같은 구조였던 것입니다.

귀족들은 또한 막강한 사병을 거느렸습니다. 평상시 하자르의 상비군은 7,000~12,000명 규모였지만, 귀족들이 자신의 가신단(retinue)을 동원하면 그 두세 배까지 군세를 늘릴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즉 귀족이라는 신분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곧 무력 자원이었던 셈입니다.


일반인의 일상 — 유목, 무역, 그리고 다종교 도시

귀족이 의례와 권력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았다면, 평범한 하자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하자르의 인구 대다수는 반(半)유목 생활을 했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가축을 몰고 초원을 이동하며 신선한 풀을 찾았고, 겨울에는 볼가강 하구의 수도 이틸(Itil)이나 다른 정착지로 돌아왔습니다. 카간 자신도 이틸은 겨울 거처일 뿐이었고, 따뜻해지면 천막을 거두어 초원으로 나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이 천막에서 살았다’는 말에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화려한 궁전과는 다른 통치의 풍경이 깔려 있습니다.

이틸의 풍경도 매우 독특했습니다. 도시는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쪽은 유대교를 믿는 카간과 귀족들의 구역, 다른 한쪽은 무슬림과 기독교도, 슬라브 이교도들이 함께 사는 상업 구역이었습니다. 이틸에는 정확히 일곱 명의 재판관이 있었는데, 무슬림 둘, 유대교도 둘, 기독교도 둘, 슬라브 이교도 한 명이라는 분배였습니다. 일반인의 일상은 이런 다종교 도시 안에서 펼쳐졌습니다.

상인 계층의 비중도 컸습니다. 하자르 카간국은 실크로드의 서쪽 끝과 북유럽의 모피·호박 무역망을 잇는 거대한 교역 허브였습니다. 일반 하자르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카라반 호위병, 강가의 운송업자, 시장 통역사, 대장장이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습니다. 노예 무역도 하자르 경제의 큰 축이었습니다. 바랑인(스칸디나비아 출신 상인)들이 슬라브인 노예를 잡아 와 하자르 시장에 팔면, 그것이 다시 비잔티움이나 아랍 세계로 넘어가는 식이었지요.


종교가 만든 또 하나의 경계

하자르 귀족과 일반인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벌려놓은 또 하나의 요인은 종교입니다.

9세기 중반, 카간과 귀족층은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동방 정교회나 이슬람을 받아들이면 비잔티움이나 칼리프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갈 위험이 있었기에, 어느 강대국에도 속하지 않은 유대교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카간과 귀족들은 요셉, 아론, 다윗 같은 유대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 백성 대다수는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자르 일반인 사회는 여전히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모자이크였습니다. 하늘 신을 섬기는 전통 튀르크 신앙, 무슬림, 기독교도, 그리고 일부 유대교도가 같은 시장에서 만나 거래했습니다. 즉 하자르 사회의 종교 풍경은 위층은 유대교, 아래층은 다종교라는 이중 구조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9세기 페르시아 역사가 이븐 알 파키의 “하자르족 전체가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진술과, 지리학자 이븐 파들란의 “지배계층이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진술이 동시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맞느냐를 따지기보다, 두 진술이 함께 그려내는 풍경 — 위층의 종교와 아래층의 종교가 다른 사회 — 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정리하며

하자르 귀족과 일반인의 삶은 같은 깃발 아래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쪽에는 의례화된 카간과 실권을 쥔 베크, 그리고 군사·행정 관직을 독점한 귀족 계층이 있었고, 그들의 권위는 비단 끈 의식 같은 신성한 의례로 강화되었습니다. 아래쪽에는 반유목 생활을 하던 가축 사육민, 카라반 호위병, 시장 상인, 슬라브·바랑인 출신 정주민들이 다종교 도시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9세기 유대교 개종은 두 세계의 거리를 더 벌렸지만, 동시에 종교적 다양성을 묶어내는 정치적 우산 역할도 했습니다. 하자르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사회’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FAQ

Q1. 하자르 카간이 정말 즉위 때 목이 졸렸나요?

알 이스타흐리, 이븐 파들란 같은 10세기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새 카간은 즉위 의식에서 비단 끈으로 거의 의식을 잃을 때까지 졸리는 의례를 거쳤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통치 햇수를 답하면, 그 기한이 끝났을 때 의례적으로 살해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후기 카간 요셉의 편지에는 이런 의례가 언급되지 않아, 실제로는 일찍 사라진 관습이거나 아랍 측 기록의 과장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Q2. 하자르 귀족과 일반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큰 차이는 권력에 대한 접근성과 종교, 그리고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귀족은 카간국의 군사·행정 요직을 독점했고, 9세기 이후 유대교를 받아들여 별도의 종교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일반인은 반유목 생활이나 상업·수공업에 종사하며 전통 튀르크 신앙, 이슬람, 기독교 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Q3.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는 서로 다른 민족이었나요?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알 이스타흐리의 기록에 따른 외모적 구분이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인종 구분이 아니라 사회 계급을 반영한 표현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백 하자르가 지배 귀족층, 흑 하자르가 피지배 또는 종속 부족 출신을 가리켰다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Q4. 하자르의 일반 백성도 유대교 신자였나요?

대부분 그렇지 않았습니다. 9세기 중반 카간과 귀족들이 유대교를 받아들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전통 튀르크 신앙, 이슬람, 기독교, 슬라브 이교 등 다양한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수도 이틸에 무슬림·유대교·기독교·이교도 재판관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다종교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Q5. 하자르 카간국은 왜 멸망했나요?

10세기 들어 북쪽에서 페체네그족이 압박해오고, 키예프 루스가 급성장하면서 하자르의 교역망이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타격은 965년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가 이끈 원정으로, 이때 사르켈 같은 주요 도시가 함락되었습니다. 이후 하자르 카간국은 다시 강력한 통일 정치체로 회복하지 못한 채 11세기경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Q1. 하자르 카간이 정말 즉위 때 목이 졸렸나요?

알 이스타흐리, 이븐 파들란 같은 10세기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새 카간은 즉위 의식에서 비단 끈으로 거의 의식을 잃을 때까지 졸리는 의례를 거쳤다고 합니다. 그 상태에서 통치 햇수를 답하면, 그 기한이 끝났을 때 의례적으로 살해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후기 카간 요셉의 편지에는 이런 의례가 언급되지 않아, 실제로는 일찍 사라진 관습이거나 아랍 측 기록의 과장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Q2. 하자르 귀족과 일반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큰 차이는 권력에 대한 접근성과 종교, 그리고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귀족은 카간국의 군사·행정 요직을 독점했고, 9세기 이후 유대교를 받아들여 별도의 종교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일반인은 반유목 생활이나 상업·수공업에 종사하며 전통 튀르크 신앙, 이슬람, 기독교 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Q3.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는 서로 다른 민족이었나요?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알 이스타흐리의 기록에 따른 외모적 구분이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인종 구분이 아니라 사회 계급을 반영한 표현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백 하자르가 지배 귀족층, 흑 하자르가 피지배 또는 종속 부족 출신을 가리켰다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Q4. 하자르의 일반 백성도 유대교 신자였나요?

대부분 그렇지 않았습니다. 9세기 중반 카간과 귀족들이 유대교를 받아들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전통 튀르크 신앙, 이슬람, 기독교, 슬라브 이교 등 다양한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수도 이틸에 무슬림·유대교·기독교·이교도 재판관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다종교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Q5. 하자르 카간국은 왜 멸망했나요?

10세기 들어 북쪽에서 페체네그족이 압박해오고, 키예프 루스가 급성장하면서 하자르의 교역망이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타격은 965년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가 이끈 원정으로, 이때 사르켈 같은 주요 도시가 함락되었습니다. 이후 하자르 카간국은 다시 강력한 통일 정치체로 회복하지 못한 채 11세기경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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