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멸망의 비밀 ─ 한때 유리시아를 호령한 제국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하자르는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카스피해 북쪽과 흑해 사이를 지배한 튀르크계 유목 제국이었습니다. 비잔틴과 동등하게 협상하고, 아랍 칼리프조의 북진을 막아내며, 유럽사에서 보기 드물게 유대교를 국교로 채택한 독특한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제국이 단 한 세대 만에 무너졌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결정타였을까요? 멸망 이전 하자르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야 멸망의 조짐은 언제부터였는가 그리고 그 작은 균열이 얼마나 큰 결과를 불러 일으켰는지 볼 수 있는 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자르라는 나라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하자르 멸망 원인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제국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감이 옵니다.

하자르는 7세기 중반 서튀르크 카가나테가 분열한 이후 카스피해 북서부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수도 아틸(Atil) 은 볼가강 하구에 자리 잡았고, 이곳을 거점으로 볼가-돈 강 운송로라는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를 통제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자르는 “강을 지배한 제국”이었습니다. 북쪽의 발트해 모피·노예가 남쪽의 비잔틴·이슬람 세계로 가려면 반드시 하자르 영토를 거쳐야 했습니다. 통행세만으로도 국가가 운영될 정도였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하자르의 종교적 독특성입니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 사이, 카간(왕)과 지배 엘리트층이 유대교로 개종합니다. 기독교의 비잔틴, 이슬람의 칼리프조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교적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느 한 쪽에 흡수되지 않으면서도 양측과 거래하기 위한 절묘한 카드였던 셈입니다.


첫 번째 단서 — 사르켈 요새가 말해주는 불안

하자르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찾으려면 사르켈(Sarkel) 요새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르켈은 하자르어로 “하얀 집”이라는 뜻으로, 돈강 하류 좌안에 세워진 거대한 석회암-벽돌 요새였습니다. 833년경 비잔틴의 기술적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고, 비잔틴 황제 테오필로스는 자신의 수석 기술자 페트로나스 카마테로스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 하자르는 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왜 비잔틴의 기술자까지 빌려와 그렇게 거대한 방어 요새를 만들었을까요?

역사학자들은 이 비싼 건설이 하자르를 위협하는 강한 지역 세력이 새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봅니다. 알렉산드르 바실리에프와 게오르기 베르나츠키 같은 학자들은 사르켈이 돈강과 볼가강을 잇는 요충지를 루스 카가나테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9세기 초부터 하자르는 이미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거대한 요새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불안의 증거였습니다.


두 번째 단서 — 키예프 루스라는 새로운 변수

하자르를 무너뜨린 결정적 외부 세력은 **키예프 루스(Kievan Rus’)**였습니다.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사이 북쪽에서 급격히 성장한 이 국가는, 처음에는 하자르의 통제 아래 있던 슬라브 부족들로부터 공물을 거둬가는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문제는 하자르의 무역 네트워크에 루스가 직접 끼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하자르가 누렸던 통행세 수입이 줄어들고, 북쪽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도 약해졌습니다.

루스는 단순히 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자르의 경제적 심장을 정확히 노렸습니다. 무역로를 건드리는 것은 곧 하자르 제국의 산소 호흡기를 끊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 번째 단서 — 스뱌토슬라프의 파괴적 원정

그리고 결정타가 옵니다.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직접 등장합니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0년대에 마침내 하자르 제국의 권력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사르켈과 타마타르카 같은 하자르 요새들을 휩쓸고, 카프카스의 카소그/체르케스인들에게까지 이르는 원형 작전을 펼친 뒤 키예프로 돌아왔습니다. 사르켈은 965년에 함락되었고, 수도 아틸은 968년 또는 969년경 그 뒤를 따랐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뱌토슬라프의 원정은 단발성 약탈이 아니라 체계적인 해체 작전이었습니다. 사르켈을 무너뜨려 서북쪽 방어선을 뚫고, 수도 아틸을 점령해 행정 중심을 무너뜨리고, 카프카스 동맹 세력까지 끊어냈습니다.

오랫동안 쌓아 올린 제국이 단 몇 년 만에 해체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결정적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기까지 보면 답이 단순해 보입니다. “스뱌토슬라프의 침공이 결정적 원인이다.” 그런데 진짜 결정적 원인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군사적 패배는 결과일 뿐, 원인은 구조였다

하자르 제국의 진짜 약점은 유목 군사력 + 무역 의존 경제 + 다종교 다민족 구성이라는 세 다리로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세 다리 중 하나만 흔들려도 전체가 기울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구조적 약점작동 방식무너졌을 때의 영향
유목 기병 의존외부 위협에 빠른 기동력으로 대응정주 도시 방어전에는 취약
무역 통행세 경제강 운송로 통제로 부 축적무역로 우회 시 수입원 직격
다종교·다민족 통합카간 권위로 느슨하게 결속중심 권력 흔들리면 즉시 분열

진짜 결정타 — 무역로 상실

하자르를 죽인 건 군사 침공보다 무역로의 영구적 상실이었습니다. 사르켈과 아틸이 함락되면서 볼가-돈 운송로를 통제하던 하자르의 역할이 루스로 넘어갑니다. 통행세도, 환적 수수료도, 외교적 지렛대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군사적으로 패배한 제국은 보통 영토를 잃고도 회복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수입원 자체를 잃은 제국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자르는 후자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종교적 독특성이 양날의 검이 되었습니다. 유대교라는 선택은 비잔틴·이슬람으로부터의 외교적 자율성을 주었지만, 무너졌을 때 어느 쪽에서도 종교적 연대 차원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기댈 곳이 없었던 셈입니다.


하자르를 무너뜨린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하자르의 멸망은 흔히 “스뱌토슬라프의 원정”으로 요약되지만, 그것은 마지막 망치질이었을 뿐입니다. 진짜 결정적 원인은 무역로에 의존한 경제 구조, 유목 군사력으로 도시 방어선을 지킬 수 없었던 군사적 한계, 그리고 어느 강대국과도 종교적으로 묶이지 못한 외교적 고립이 겹친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제국도 핵심 수입원과 외교적 안전망을 동시에 잃으면 한 세대 안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하자르는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FAQ

Q1. 하자르 카가나테는 정확히 언제 멸망했나요? A. 일반적으로 965년 사르켈 함락과 968~969년경 수도 아틸 함락을 멸망의 분기점으로 봅니다. 다만 일부 잔존 세력은 11세기까지 캅카스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Q2. 하자르가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멸망에 영향을 주었나요? A. 직접적인 멸망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간접적 영향은 있었습니다. 비잔틴·이슬람 양쪽으로부터 외교적 자율성을 얻은 대신, 위기 상황에서 종교적 연대 차원의 외부 지원을 받기 어려웠던 점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Q3. 스뱌토슬라프 1세의 원정이 그렇게 결정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사르켈, 아틸, 타마타르카로 이어지는 핵심 거점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사 거점뿐 아니라 무역 거점까지 동시에 사라지면서 회복 기반이 함께 붕괴했습니다.

Q4. 하자르가 망한 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요? A. 일부는 키예프 루스 영역으로 흡수되었고, 일부는 캅카스 산악 지역과 크림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일 카라이트(Karaite) 유대인 공동체나 일부 튀르크계 집단과의 연관성도 학계에서 논의되지만, 직접적 후손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Q5. 하자르 유적지는 지금도 발굴이 가능한가요? A. 일부는 가능하지만 핵심 유적지인 사르켈은 20세기 중반 침랸스크 저수지 건설로 수몰되었습니다. 수몰 전 미하일 아르타모노프가 1930년대에 대규모 발굴을 진행한 자료가 현재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Q1. 하자르 카가나테는 정확히 언제 멸망했나요?

A. 일반적으로 965년 사르켈 함락과 968~969년경 수도 아틸 함락을 멸망의 분기점으로 봅니다. 다만 일부 잔존 세력은 11세기까지 캅카스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Q2. 하자르가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멸망에 영향을 주었나요?

A. 직접적인 멸망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간접적 영향은 있었습니다. 비잔틴·이슬람 양쪽으로부터 외교적 자율성을 얻은 대신, 위기 상황에서 종교적 연대 차원의 외부 지원을 받기 어려웠던 점은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Q3. 스뱌토슬라프 1세의 원정이 그렇게 결정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사르켈, 아틸, 타마타르카로 이어지는 핵심 거점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사 거점뿐 아니라 무역 거점까지 동시에 사라지면서 회복 기반이 함께 붕괴했습니다.

Q4. 하자르가 망한 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요?

A. 일부는 키예프 루스 영역으로 흡수되었고, 일부는 캅카스 산악 지역과 크림반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일 카라이트(Karaite) 유대인 공동체나 일부 튀르크계 집단과의 연관성도 학계에서 논의되지만, 직접적 후손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Q5. 하자르 유적지는 지금도 발굴이 가능한가요?

A. 일부는 가능하지만 핵심 유적지인 사르켈은 20세기 중반 침랸스크 저수지 건설로 수몰되었습니다. 수몰 전 미하일 아르타모노프가 1930년대에 대규모 발굴을 진행한 자료가 현재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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