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사회의 신분 구조는 고대 유라시아에서 가장 독특한 권력 체계 중 하나였습니다. 맨 꼭대기에 왕이 두 명이나 있었고, 같은 하자르인이라도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로 나뉘어 운명이 달랐죠. 이 글에서는 7~10세기 카스피해 북쪽을 호령했던 하자르제국이 어떻게 이런 복잡한 신분 구조를 만들고 운영했는지, 그리고 그 꼭대기의 성스러운 왕이 정말로 목 졸려 죽임을 당했는지까지 짚어봅니다. 2명의 왕이라니 , 전례에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하자르 사회 , 그리고 이들은 이 2명의 왕으로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갔는지 , 지금이라면 2명의 대통령이라면 싸울 수 밖에 없어 보이는데요.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자르 제국은 어떤 나라였나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배경을 잡고 가야 합니다. 하자르(Khazar)는 7세기 중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약 300년간 카스피해 북쪽에서 흑해 북쪽, 볼가강 유역까지 광활한 초원을 지배했던 튀르크계 반(半)유목 제국입니다. 서튀르크 카간국이 무너진 뒤 등장한 후계 국가 중 가장 강력했고, 비잔티움과 우마이야·압바스 칼리파국 사이에서 완충국 역할을 하며 실크로드 서쪽 무역을 장악했어요.
하자르는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튀르크계 지배층 아래 불가르인, 알란인, 슬라브인, 마자르인, 유대인, 무슬림 상인까지 25~30개 민족이 섞여 살았죠.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다스리려다 보니 신분 구조도 유라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정교하게 발전했습니다.

이중 왕권 — 하늘에 속한 왕, 땅을 다스리는 왕
하자르 신분 구조의 정점은 두 명의 왕이 차지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이중 왕권(dual kingship) 또는 성스러운 왕권(sacral kingship) 이라고 부르는 이 체제는 하자르 사회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예요.
카간(Khagan) —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성스러운 왕
맨 위에는 카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전통적으로 아시나(Ashina) 가문 — 고대 튀르크 제국의 혈통을 이은 신성한 가문 — 에서만 나왔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하자르의 카간은 사실상 신적 상징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거예요.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알-이스타흐리의 기록에 따르면, 카간은 평상시 궁전 깊은 곳에 은둔했고, 일반 백성은 물론 고관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카간을 만나려면 신발을 벗고,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며, 향나무를 태워 연기로 자신을 정화해야 했어요. 하자르인에게 불과 연기는 신성한 정화의 매개였거든요.
베크(Bek) — 실제로 나라를 움직인 왕
두 번째 왕은 베크(Bek), 또는 카간-베크(Khagan-Bek), 아랍 사료에선 이샤(ʾīšā) 로 불렸습니다. 이 사람이 실질적인 통치자였어요. 군대를 지휘하고, 세금을 걷고, 외교를 하고, 재판을 주재하는 모든 행정·군사·경제 권한이 베크의 손에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이상한 구조가 생겼을까요? 학계의 설명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고대 튀르크 유목민의 좌·우익 분권 전통에서 온 것이라는 설. 둘째, 9세기경 하자르 지배층이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종교적 권위와 세속 권력이 분리된 결과라는 설. 셋째, 이란계 유목민의 영향이라는 설. 명확한 결론은 아직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하자르인들은 성스러움과 실권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지 않는 지혜를 가졌다는 겁니다.

성스러운 왕의 섬뜩한 결말 — 카간은 목 졸려 죽임당했다
이 부분이 하자르 사회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입니다. 카간은 영원히 다스리지 못했어요.
10세기 아랍 지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자르의 고관들은 새 카간을 옹립할 때 비단 끈으로 그의 목을 조르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대는 얼마나 오래 다스리고자 하는가?” 숨이 막혀가던 카간은 헐떡이며 숫자를 말했고, 그 햇수가 지나면 실제로 의례적으로 처형되었어요. 이븐 파들란은 카간의 재임 기간이 40년을 넘기면 “노령으로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그를 죽였다고 적었습니다.
끔찍하게 들리지만, 이 관습은 사실 고대 유라시아의 “성스러운 왕” 의례의 전형입니다. 왕은 땅의 풍요와 연결된 신성한 존재이므로, 그의 활력이 쇠하면 땅도 쇠한다는 믿음이 있었죠. 그래서 왕을 “젊고 싱싱할 때” 교체해야 한다는 논리였어요. 카간의 무덤 위치는 완전히 숨겼고, 무덤 앞을 지나는 행인은 말에서 내려 절하고 걸어서 지나가야 했습니다. 마치 훗날 칭기즈 칸의 무덤 의례와 비슷하죠.
다만 주의할 점. 10세기 중반 하자르 왕 요셉이 스페인의 유대인 관리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관습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연구자들은 유대교 개종 이후 하자르가 인신 공양적 요소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 — 같은 민족, 다른 신분
왕 아래에는 또 하나의 큰 구분선이 있었습니다. 바로 백 하자르(Ak-Khazar) 와 흑 하자르(Qara-Khazar) 의 구분이에요.
10세기 알-이스타흐리는 “백 하자르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 하얀 피부의 미남들이고, 흑 하자르는 피부가 검어 인도인처럼 보인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읽은 근대 학자들은 이걸 인종적 구분으로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현대 학계의 합의는 다릅니다.
이 구분은 인종이 아니라 계급 구분이라는 거예요. 튀르크계 유목 사회에는 원래 “백(아크)”은 지배층 전사 계급, “흑(카라)”은 평민·피지배 계급을 뜻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튀르크 언어에서 “아크”는 “고귀한”, “카라”는 “흔한”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죠. 알-이스타흐리가 이 이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외모 묘사로 확장한 것이 혼선의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백 하자르 — 전사 귀족과 지배 엘리트
백 하자르는 카간을 호위하고, 군대를 이끌고, 조공을 걷고, 정복지를 다스렸습니다.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들은 타르칸(tarkhan, 장군) 이나 투둔(tudun, 지방 총독) 같은 관직으로 올라갔어요. 특히 투둔은 크림반도의 비잔티움령 도시들처럼 공식적으로는 다른 나라 영토인 곳에도 파견되어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일종의 고위 감독관이었죠.
흑 하자르 — 평민과 전사 충당의 기반
흑 하자르는 수적으로 압도적 다수였습니다. 목축민, 정착 농민, 수공업자, 상인 같은 일반 백성이 여기 속했어요. 이들도 전쟁이 나면 귀족의 종자로 동원되어 병력을 보충했는데, 하자르의 상비군 7,000~12,000명은 유사시 2~3배로 늘어났고, 이 증원 병력 대부분이 흑 하자르에서 왔습니다.
이 계급 구조에서 특이한 점 하나. 하자르는 피지배 민족의 귀족까지 체제에 포섭했어요. 25개 조공국의 왕들은 자기 딸을 카간의 후궁으로 보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 대신 자신의 땅에서 제한된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농경 민족의 귀족층이 유목민 지배층 아래 제2등급 귀족으로 편입된 셈이죠.

전문 계층과 외국인 용병 — 하자르 사회의 또 다른 층
하자르 사회의 흥미로운 점은 기능별 전문 계층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군사령관은 타르칸이었고, 도시 관리자는 투둔, 참모장격은 자브시가르(Javshighar) 라는 직책이 맡았어요. 수도 이틸(Atil)에는 일곱 명으로 구성된 대법관 회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각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교)를 대표하는 판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하자르인은 토라로 재판받고, 무슬림은 샤리아로, 기독교인은 비잔티움 법으로, 이교도는 관습법으로 재판받았어요. 종교 다원주의가 사법 시스템에까지 제도화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하자르 군의 핵심 전력은 오르시야(Orsiyya) 또는 알-라리시야라는 무슬림 용병대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호라즘(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카간의 친위대이자 최정예 부대 역할을 했어요. 계약 조건에 “동족 무슬림과는 싸우지 않는다” 는 조항이 있었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로 대우가 좋았습니다. 이교도 유목 제국이 이슬람 용병을 상비 친위대로 둔 것 자체가 하자르 특유의 실용주의를 보여주죠.
사회 맨 아래에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상당수가 북쪽 슬라브 지역에서 바이킹(바랑기아인)이 잡아다 하자르 시장에서 파는 경로로 들어왔고, 이틸과 사르켈 같은 도시의 노예 시장은 유라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했습니다.
글을 마치며 — 5층 피라미드가 만든 300년의 질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자르 사회의 신분 구조는 크게 다섯 층의 피라미드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맨 위에 성스러운 카간과 실권자 베크의 이중 왕권이, 그 아래 타르칸·투둔 같은 백 하자르 귀족 엘리트가, 그다음 피정복 민족의 제2등급 귀족이, 그 아래 흑 하자르 평민 대중이, 맨 아래 노예가 자리했습니다. 이 복잡한 체제를 종교 다원주의 사법 시스템과 무슬림 용병대 같은 실용적 장치로 묶어낸 결과가 바로 300년의 팍스 하자리카(Pax Khazarica) 였어요. 965년 키예프 루스의 스비야토슬라프 공이 사르켈을 함락시키며 제국은 무너졌지만, 이 특이한 이중 왕권 모델은 초기 루스와 헝가리에도 이식되어 동유럽 정치사에 오래 남는 유산이 되었습니다.
FAQ
Q1. 카간과 베크 중 누가 더 “진짜 왕”이었나요?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하자르 초기(7~8세기)에는 카간이 실권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9세기 들어 점차 성스러운 상징으로 축소되면서 베크가 실권자로 부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세기 중반 하자르 왕 요셉이 스스로를 “카간-베크” 또는 “멜렉(melek, 왕)”이라 칭한 것을 보면, 이 무렵엔 두 직위가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유대교 개종이 이런 통합을 가속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Q2.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는 결혼할 수 있었나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드물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튀르크 유목 사회 일반에서 계급 간 통혼은 귀족 쪽의 위신을 깎는 행위로 여겨졌고, 하자르도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다만 하자르가 극도로 다민족·다종교 사회였기에 완전한 고정 카스트라기보단 “느슨한 신분 구분”에 가까웠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Q3. 여성의 지위는 어땠나요?
유목 튀르크 사회의 전통에 따라 하자르 여성은 다른 중세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습니다. 카간의 카툰(왕비)은 공식 행사에서 함께 등장했고, 조공국 왕들이 딸을 카간에게 보내는 정략결혼이 제도화되어 있어 왕비·후궁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어요.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하자르 공주 테오도라와 결혼해 그녀를 황후로 삼은 사례도 있습니다. 다만 일반 여성의 일상생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 조명은 어렵습니다.
Q4. 하자르의 유대교 개종이 신분 구조에 영향을 주었나요?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9세기경 카간과 베크를 포함한 지배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이면서 성스러운 왕의 인신 공양적 의례가 사라졌고, 수도 이틸의 사법 시스템에서 토라 기반 재판이 공식화되었어요. 다만 이 개종은 지배 엘리트에 한정되었으며, 흑 하자르 대다수와 피지배 민족은 기존의 텡그리 신앙, 이슬람, 기독교, 이교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즉 종교는 하자르 사회에서 계급을 나누는 또 하나의 축이 되었어요.
Q5. 하자르 신분 구조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초기 키예프 루스와 헝가리가 하자르 모델을 상당 부분 차용했습니다. 특히 루스 초기 군주들은 한동안 스스로를 “카간”이라 불렀고, 헝가리의 켄데-쿤두(kende-kündü)와 귤라(gyula) 이중 지도 체제도 하자르 이중 왕권의 변형으로 해석됩니다. 또 하자르의 반(半)자치적 다민족 조공 체제는 훗날 킵차크 칸국과 금호르드(Golden Horde) 의 통치 방식에도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Q1. 카간과 베크 중 누가 더 “진짜 왕”이었나요?
시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하자르 초기(7~8세기)에는 카간이 실권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9세기 들어 점차 성스러운 상징으로 축소되면서 베크가 실권자로 부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세기 중반 하자르 왕 요셉이 스스로를 “카간-베크” 또는 “멜렉(melek, 왕)”이라 칭한 것을 보면, 이 무렵엔 두 직위가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유대교 개종이 이런 통합을 가속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Q2. 백 하자르와 흑 하자르는 결혼할 수 있었나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드물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튀르크 유목 사회 일반에서 계급 간 통혼은 귀족 쪽의 위신을 깎는 행위로 여겨졌고, 하자르도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다만 하자르가 극도로 다민족·다종교 사회였기에 완전한 고정 카스트라기보단 “느슨한 신분 구분”에 가까웠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Q3. 여성의 지위는 어땠나요?
유목 튀르크 사회의 전통에 따라 하자르 여성은 다른 중세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습니다. 카간의 카툰(왕비)은 공식 행사에서 함께 등장했고, 조공국 왕들이 딸을 카간에게 보내는 정략결혼이 제도화되어 있어 왕비·후궁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어요.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하자르 공주 테오도라와 결혼해 그녀를 황후로 삼은 사례도 있습니다. 다만 일반 여성의 일상생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 조명은 어렵습니다.
Q4. 하자르의 유대교 개종이 신분 구조에 영향을 주었나요?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9세기경 카간과 베크를 포함한 지배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이면서 성스러운 왕의 인신 공양적 의례가 사라졌고, 수도 이틸의 사법 시스템에서 토라 기반 재판이 공식화되었어요. 다만 이 개종은 지배 엘리트에 한정되었으며, 흑 하자르 대다수와 피지배 민족은 기존의 텡그리 신앙, 이슬람, 기독교, 이교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즉 종교는 하자르 사회에서 계급을 나누는 또 하나의 축이 되었어요.
Q5. 하자르 신분 구조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초기 키예프 루스와 헝가리가 하자르 모델을 상당 부분 차용했습니다. 특히 루스 초기 군주들은 한동안 스스로를 “카간”이라 불렀고, 헝가리의 켄데-쿤두(kende-kündü)와 귤라(gyula) 이중 지도 체제도 하자르 이중 왕권의 변형으로 해석됩니다. 또 하자르의 반(半)자치적 다민족 조공 체제는 훗날 킵차크 칸국과 금호르드(Golden Horde) 의 통치 방식에도 간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