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여성의 지위 ─ 카툰은 어떻게 비잔틴 황후가 되고, 비잔틴 패션을 흔들었을까?

하자르 여성의 지위를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한 유목 제국의 젠더 풍경을 살피는 것을 넘어섭니다.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카스피해 북쪽을 호령했던 하자르 카간국에서, 여성은 카간의 부인이라는 단순한 자리 이상으로 외교의 카드, 종교 변동의 매개, 패션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의외로 화려하고, 또 의외로 우리가 잘 모르는 영역입니다. 늘 역사를 공부할 때는 시대적 문화적 경제적인 부분을 많이 봤으나 , 이번에는 하자르 여성의 지위에 대해 한번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어느정도까지 할 수 있었나 를 살펴보며 , 현대와 그 시절의 차이점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감사합니다.

기원후 820년경 하자르 카간국의 직접 지배 영역(짙은 파랑)과 영향권(보라)을 보여주는 카스피해·흑해 일대 지도

하자르 사회 자체가 여성에게 어떤 무대였나

하자르 카간국(c. 650~969 CE)은 다민족·다종교 국가였습니다. 텡그리 신앙,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한 영토 안에서 공존했고, 8세기 중반에는 지배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이는 독특한 길을 걸었죠. 이런 다층적 사회는 여성에게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자르는 튀르크계 유목 문화의 큰 흐름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튀르크-몽골 유목 사회의 한 가지 특징이 있죠. 정주 농경 문명에 비해 엘리트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큰 자율성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학자 브루노 데 니콜라(Bruno De Nicola)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유목민의 이동성과 분산된 살림 단위가 여성에게 자원 분배·외교·가내 행정을 맡길 여지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짚어둘 게 있습니다. 하자르인 자신이 남긴 1차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정보는 대부분 아랍 여행자(이븐 파들란, 알 마수디 등), 비잔틴 연대기, 그리고 9세기 「하자르 서신」 같은 외부자 시선이거나 단편적 자료입니다. 그래서 하자르 여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늘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함께 인정하고 가야 합니다.

카툰(Khatun) — 하자르 왕비의 자리는 어떤 무게였을까

하자르 사회 최상층 여성에게 붙던 호칭이 카툰(khatun)입니다. 어원적으로는 소그드어 ‘xwāten'(군주의 아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괵튀르크 시기부터 이미 카간의 정실에게 사용되던 귀족 여성 호칭이었습니다.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들어오기 전, 부하라의 여왕에게도 같은 호칭이 쓰였을 만큼 격이 높은 단어였죠.

카간의 그늘 vs 카툰의 실권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하자르의 정치 구조는 잘 알려진 대로 **이중 왕권(dual kingship)**이었습니다. 카간은 신성한 상징으로 베일에 싸인 채 거의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실질적인 정치·군사 권력은 베크(Bek, 또는 Khagan-Bek)가 행사했습니다. 카간이 의례적 정점에 머무는 동안, 카툰의 위치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븐 파들란의 10세기 보고에 따르면 카간에게는 25명의 부인과 60명의 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숫자가 사실이든 과장이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자르 궁정에는 여러 부족·민족 출신의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위계와 영향력의 차등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자르 카툰은 비록 즉위해 통치하는 여성 군주는 아니었지만, 가내 행정·궁정 의례·외교 결혼의 결정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이 점은 동시대 셀주크나 후대 몽골에서 카툰이 행사한 권한과 비교할 때, 같은 튀르크-몽골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외교 무기로서의 하자르 공주 — 치차크 이야기

하자르 여성의 지위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단연 치차크(Tzitzak) 공주입니다. 그녀의 일생은 8세기 유라시아 외교의 한 페이지 자체입니다.

비잔틴 황태자와의 결혼, 그리고 새 이름 이리니

732년경, 비잔틴 제국은 우마이야 칼리프국의 위협 앞에서 동맹이 절실했습니다. 황제 레오 3세는 하자르 카간 비하르(Bihar)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했고, 그 결실로 카간의 딸 치차크가 비잔틴 황태자 콘스탄티누스(훗날 콘스탄티누스 5세)와 결혼합니다. ‘Tzitzak’은 튀르크어 ‘çiçek(꽃)’의 그리스어 표기로 추정됩니다.

치차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세례를 받고 ‘이리니(Irene, 평화)’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750년 1월 25일, 그녀는 미래의 황제 레오 4세를 낳았는데, 이 인물은 어머니의 출신을 따 **”하자르인 레오(Leo the Khazar)”**라고 불렸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한 황제가 모계로 하자르 혈통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죠.

결혼 예복이 만든 패션 신드롬

치차크 이야기에서 정말 흥미로운 대목은 그녀의 결혼 예복입니다. 그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입었던 옷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비잔틴 남성들 사이에서 ‘치차키온(tzitzakion)’이라 불리는 새로운 의복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외국 공주의 결혼식 패션이 제국 수도의 남성복 트렌드를 바꿔놓은 것이죠.

이 일화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의미는 묵직합니다. 하자르 여성이 단순히 정략결혼의 도구로만 소비되지 않았다는 증거거든요. 그녀의 문화·복식·미학은 받아들이는 쪽 사회에 영향을 남길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신학자 테오파네스(Theophanes the Confessor)는 이리니가 성서를 읽을 줄 알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그녀가 단순한 외교 액세서리가 아니라 지적·종교적 주체였음을 시사합니다.

두 번째 외교 결혼, 그리고 비극

하자르 공주의 외교 활용은 일회성이 아니었습니다. 758년, 아바스 칼리프 알 만수르는 아르메니아 총독 야지드 이븐 우사이드(Yazid ibn Usayd)에게 하자르 카간 바그하투르의 딸을 신부로 맞이해 평화를 맺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번엔 동쪽 이슬람 세계와의 결혼 동맹이었죠.

그러나 이 결혼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하자르 공주는 결혼 직후 사망했는데(출산 중 사망설이 유력합니다), 카간은 이를 음모로 의심했고 그 결과 762~764년 하자르군이 캅카스를 넘어 칼리프국 영토를 침공하는 대규모 전쟁이 벌어집니다. 한 여성의 죽음이 두 거대 제국 사이에 군사 충돌을 촉발한 셈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자르 공주는 단지 ‘시집간 딸’이 아니라 카간국의 자존심과 외교적 신뢰를 짊어진 정치적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안위가 곧 국가 간 신의의 척도였던 것이죠.

평민 여성, 그리고 카간 궁정 밖의 풍경

여기까지는 주로 왕실 여성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하자르 여성의 삶은 어땠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부분에 대한 직접 기록은 매우 적습니다. 다만 고고학적 단서들이 몇 가지 그림을 제공합니다.

하자르 영역의 대표 물질문화인 살토보-마야키 문화(Saltovo-Mayaki culture, 8~10세기) 발굴지에서 출토된 여성 묘는 적지 않은 정보를 줍니다. 일부 여성 무덤에는 활과 화살, 말 부장품이 함께 묻혔는데, 이는 유라시아 스텝 전반에 퍼져 있던 ‘여성 전사’ 모티프와 닿아 있습니다. 학계는 이를 두고 모든 하자르 여성이 전사였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부 엘리트 여성에게 군사·기마 활동이 열려 있었다는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자르 사회는 다민족·다종교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의 일상 규범은 소속 종교에 따라 크게 갈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대교를 받아들인 지배층 여성과, 이슬람·기독교·텡그리 신앙을 따르던 다른 계층 여성의 삶이 같았을 리 없죠. 이 다원성이야말로 하자르 사회를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러나 동시에 매력적으로 만드는 부분입니다.

정리 — 하자르 여성, 단순화하기 어려운 그 모습

하자르 여성의 지위는 ‘높았다’ 혹은 ‘낮았다’는 단답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카툰의 자리는 정주 사회 왕비보다 행정·외교에서 더 큰 운신의 폭을 가졌고, 치차크 같은 공주는 비잔틴의 황실까지 영향력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카간의 수많은 부인 중 한 명이 되거나 외교 결혼의 도구로 보내지는 운명에서 자유롭지도 않았죠. 여기에 다민족·다종교 사회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 하자르 여성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모자이크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그 모자이크의 빈 칸들은 지금도 새로운 발굴과 연구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하자르 여성이 직접 카간이 된 사례가 있나요? A. 명확히 여성 카간으로 즉위한 사례는 사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카툰은 정실 왕비로서 궁정 의례·가내 행정·외교 결혼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며, 후대 몽골의 토레게네 카툰처럼 섭정형 통치자가 하자르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합니다.

Q2. 치차크는 어디까지 실존이 확인된 인물인가요? A. 치차크의 결혼과 비잔틴 황후 책봉은 비잔틴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의 기록 등 1차 사료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녀의 아들 레오 4세는 황제로 즉위했으며 ‘하자르인 레오’라는 별명으로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Q3. 하자르 여성도 일부다처제 환경에 살았나요? A. 카간 같은 최상층 남성의 일부다처는 사료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평민 가정의 결혼 형태는 종교·민족·계층에 따라 달랐으며, 일률적으로 일부다처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Q4. 하자르 여성도 유대교로 개종했나요? A. 8세기 중반 지배층의 유대교 수용 이후, 카툰을 비롯한 왕실 여성도 유대교 신앙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카간국 전체 인구의 종교 분포는 다양했고, 일반 여성 다수는 이슬람·기독교·텡그리 신앙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Q5. 하자르 여성에 대한 자료는 왜 이렇게 적은가요? A. 하자르인 자신이 남긴 1차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자료는 외부 관찰자(아랍·비잔틴·유대 측)의 단편적 기술과 살토보-마야키 문화권의 고고학 자료뿐이며, 이마저도 여성 일상보다는 엘리트 사례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Q1. 하자르 여성이 직접 카간이 된 사례가 있나요?

명확히 여성 카간으로 즉위한 사례는 사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카툰은 정실 왕비로서 궁정 의례·가내 행정·외교 결혼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며, 후대 몽골의 토레게네 카툰처럼 섭정형 통치자가 하자르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합니다.

Q2. 치차크는 어디까지 실존이 확인된 인물인가요?

치차크의 결혼과 비잔틴 황후 책봉은 비잔틴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의 기록 등 1차 사료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녀의 아들 레오 4세는 황제로 즉위했으며 ‘하자르인 레오’라는 별명으로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Q3. 하자르 여성도 일부다처제 환경에 살았나요?

카간 같은 최상층 남성의 일부다처는 사료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평민 가정의 결혼 형태는 종교·민족·계층에 따라 달랐으며, 일률적으로 일부다처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Q4. 하자르 여성도 유대교로 개종했나요?

8세기 중반 지배층의 유대교 수용 이후, 카툰을 비롯한 왕실 여성도 유대교 신앙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카간국 전체 인구의 종교 분포는 다양했고, 일반 여성 다수는 이슬람·기독교·텡그리 신앙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Q5. 하자르 여성에 대한 자료는 왜 이렇게 적은가요?

하자르인 자신이 남긴 1차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자료는 외부 관찰자(아랍·비잔틴·유대 측)의 단편적 기술과 살토보-마야키 문화권의 고고학 자료뿐이며, 이마저도 여성 일상보다는 엘리트 사례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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