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르 가족 구조와 결혼 풍습은 단순한 풍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 다민족 카간국이 어떻게 거대한 영토를 묶어두었는지를 보여주는 정치 시스템 그 자체입니다. 아랍 여행가 이븐 파들란이 남긴 기록, 비잔틴 황제와의 결혼 동맹,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일상까지 ─ 결혼 한 가지 키워드만 따라가도 하자르 사회의 작동 방식이 한눈에 들어와요. 이 글에서는 카간의 거대한 하렘부터 평민의 가정까지, 층위별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25명 아내 그리고 60명의 첩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결혼입니다. 자기 사리사욕이 아닌 많은 아내를 두면서 가족이라는 연대로 함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번 글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이 곧 정치였다 — 하자르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
하자르 카간국(약 7~10세기)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를 호령했던 튀르크계 유목 국가입니다. 다민족·다종교 국가였고, 통치 계층은 8세기 말~9세기 초에 유대교로 개종했지만 백성들은 텡그리교·이슬람교·기독교를 그대로 유지했어요.
이런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통합 도구가 바로 결혼이었습니다. 카간은 결혼을 통해 휘하 부족을 묶었고, 외국과의 동맹을 결혼으로 봉인했으며, 일반 백성들조차 자기 종교 공동체 안에서 결혼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했어요.
저는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흥미로운 비유 하나가 떠올랐어요. 하자르의 결혼은 마치 다국적 기업의 인수합병 계약처럼 작동했다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개인적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적어도 지배층에는 거의 없었고, 결혼은 영토와 권력과 충성의 거래 단위였습니다.
카간의 결혼 — 25명의 아내, 60명의 첩
하자르 결혼 풍습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기록은 이븐 파들란(Ibn Fadlan)의 리살라(Risāla)입니다. 920년대에 압바스 칼리프조의 외교 사절로 볼가 강 유역을 여행한 이 인물은 하자르 카간의 결혼 시스템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카간은 25명의 아내를 두는데, 각각은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왕의 딸이다. 동의에 의해 또는 강제로 데려온다. 60명의 첩이 있고, 모두 빼어난 미모이다.
총 85명. 각자 별도의 처소를 가졌고, 환관이 시중을 들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25”라는 숫자의 의미
여기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게 25라는 숫자예요. 학자 토머스 누난(Thomas S. Noonan)은 이 숫자를 단순한 사치가 아닌 정치 지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븐 파들란이 25명의 아내가 모두 “휘하 왕의 딸”이라고 적었기 때문이에요. 즉 카간은 25개의 종속 민족 또는 부족을 거느리고 있었고, 각 부족장의 딸을 한 명씩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그 충성을 봉인했던 셈입니다.
유대인 여행가 엘다드 하다니(Eldad ha-Dani)도 비슷한 시기에 하자르가 25~28개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적었고, 카간 요셉이 직접 답신한 편지에도 다수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죠. 결혼 관계와 조공 관계가 겹쳐 있었다는 뜻입니다.
카간 자신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점 하나 더. 카간은 막대한 하렘을 두었지만 정작 본인은 거의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1년에 4번 정도만 궁 밖으로 나섰고, 외출 시에는 뒤에서 거대한 금속 원반을 들어 햇빛을 반사시켰다고 해요. 카간을 태양 그 자체로 표현한 의례적 장치였던 거죠.
이 부분이 저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카간은 결혼으로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일상에서는 완전히 격리된 신성한 존재였다는 점이에요. 즉, 결혼은 카간이 세상과 맺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셈입니다.
외교 무대로 나간 결혼 — 비잔틴부터 칼리프조까지
하자르의 결혼 풍습은 국경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카간의 딸들은 국제 결혼 동맹의 카드로 적극 활용됐어요.
| 시기 | 결혼 사례 | 의미 |
|---|---|---|
| 약 705년 | 카간 부시르 글라반의 누이 → 비잔틴 폐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 | 황제 복위 지원 동맹 |
| 732년 | 카간의 딸 치차크(Tzitzak) →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 | 우마이야조 견제용 동맹, 그녀의 아들이 후일 레오 4세 |
| 758년 | 카간 바가투르의 딸 → 압바스조 아르메니아 총독 야지드 이븐 우사이드 | 칼리프조와의 화해 시도 |
특히 치차크(이후 세례명 이레네)의 사례는 인상적입니다.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한 의상 “치치키온(tzitzakion)”이 비잔틴 궁정 패션에 녹아들 정도로 영향력이 컸어요. 즉 하자르의 신부는 단순히 시집간 게 아니라, 자기 문화를 새 나라에 이식한 셈입니다.
반대 방향의 이야기도 있어요. 758년 압바스조와의 결혼 동맹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카간의 딸이 출산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시중들이 “아랍 측에서 독살했다”고 보고하자 격분한 카간이 군대를 보내 캅카스 남부를 초토화시켰거든요. 결혼이 동맹의 봉인이었던 만큼, 그 신부의 죽음은 곧 전쟁 선포의 명분이었던 거죠.
평민의 결혼 — 카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
여기까지 읽으시면 “하자르 결혼 = 카간의 거대한 하렘”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으실 텐데, 이건 절반의 진실입니다. 일반 백성의 결혼은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어요.
종교 공동체별 자치
수도 이틸(Itil)의 사법 구조를 보면 그 다양성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이틸에는 7명의 재판관이 있었는데 무슬림 2명, 유대인 2명, 기독교인 2명, 이교도(슬라브계) 1명으로 배치되어 있었어요. 결혼·이혼·상속 같은 가족 사안은 각 종교 공동체의 율법에 따라 처리되었습니다.
즉 평민에게 결혼은 카간의 정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거예요. 무슬림은 무슬림끼리, 유대교도는 유대교도끼리, 기독교도는 기독교도끼리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통혼은 일어났을까
다만 완전한 분리는 아니었어요. 학자들은 통치층의 유대교 개종 이후 유대인 이주민과 하자르인 사이의 통혼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이는 내부 부족(inner tribe)과 외부 부족(outer tribe) 사이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외곽 유목 부족은 텡그리교적 결혼 풍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 이 부분은 1차 사료가 거의 없어서 학계에서도 “추정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뢰해도 되는가 — 사료를 보는 눈
여기서 중요한 단서 하나. 이븐 파들란의 25명 아내·60명 첩 기록은 외국인의 관찰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는 하자르를 직접 가지 않고 인근에서 보고를 종합한 것으로 추정되며, 하렘 묘사 일부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학계에서 평가받아요. “환관이 부르면 눈 깜짝할 새보다 빠르게 도착한다” 같은 묘사는 명백한 수사적 과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 자체와 정치적 결혼 구조라는 큰 그림은 다른 사료(이스타크리, 이븐 하우칼, 알 마수디)와 교차 검증이 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세부 묘사는 걸러 듣더라도 결혼이 카간의 통치 시스템 핵심이었다는 점은 신뢰할 만하다고 봅니다.
정리 — 결혼 한 가지로 읽는 하자르 사회
하자르의 가족 구조와 결혼 풍습은 한 사회 안에 세 가지 층위가 공존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카간 차원에서는 결혼이 부족 통합과 국제 동맹의 수단이었고, 외교 무대에서는 비잔틴·압바스조와의 거래 카드였으며, 평민 차원에서는 각 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상 의례였어요. 25명의 아내라는 숫자는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25개 부족을 묶는 정치 지도였고, 치차크 공주의 비잔틴행은 하나의 결혼이 어떻게 두 제국을 묶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결혼이라는 한 가지 키워드만 따라가도 하자르가 왜 그렇게 오래 다민족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가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FAQ)
Q1. 하자르 카간이 정말 25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A. 가장 직접적인 출처는 920년대 이븐 파들란의 리살라예요. 이 숫자는 다른 무슬림 지리학자들의 기록과 큰 틀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정확한 명부는 아니어도 카간이 정치적 결혼으로 다수의 부인을 둔 것은 사실”로 봅니다. 다만 일부 세부 묘사는 외부 관찰자의 과장이 섞여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어요.
Q2. 하자르 통치층이 유대교로 개종한 후에도 일부다처제는 유지되었나요? A. 네, 유지되었습니다. 통치층의 유대교 개종 이후에도 카간의 하렘은 그대로 존속했어요. 이는 하자르의 유대교 수용이 종교적 신앙과 유목 군주의 정치 관습을 분리해서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됩니다. 즉 종교는 바꿨지만 유목 카간의 통치 의례는 그대로 둔 거죠.
Q3. 비잔틴 황제와 결혼한 하자르 공주가 정말 있었나요? A. 가장 유명한 사례는 732년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와 결혼한 하자르 공주 치차크(Tzitzak)입니다. 그녀는 세례 후 이레네라는 이름을 받았고, 그 아들이 훗날 황제 레오 4세가 되었어요. 그래서 레오 4세는 “하자르인 레오(Leo the Khazar)”라는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Q4. 하자르 일반 백성의 결혼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A. 종교 공동체별 자치가 핵심이었습니다. 무슬림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유대인은 할라카에 따라, 기독교인은 교회법에 따라 결혼했어요. 수도 이틸에는 종교별로 별도의 재판관이 있어 결혼·이혼·상속 분쟁을 각자의 율법으로 처리했습니다. 카간의 화려한 하렘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이었던 셈이에요.
Q5. 하자르 결혼 풍습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어떤 자료를 봐야 하나요? A. 1차 사료로는 이븐 파들란의 리살라, 카간 요셉의 답신(Khazar Correspondence), 셰흐테르 편지(Schechter Letter)가 핵심입니다. 다만 1차 사료들이 단편적이고 외부인 시각이 많아, 토머스 누난, 피터 골든(Peter Golden) 같은 현대 연구자들의 논문을 함께 보시는 게 좋아요. 한국어 자료는 아직 제한적이지만, 영어권에서는 khazaria.com 이 1차 사료 번역과 학술 논문을 잘 정리해두고 있습니다.
Q1. 하자르 카간이 정말 25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가장 직접적인 출처는 920년대 이븐 파들란의 리살라예요. 이 숫자는 다른 무슬림 지리학자들의 기록과 큰 틀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정확한 명부는 아니어도 카간이 정치적 결혼으로 다수의 부인을 둔 것은 사실”로 봅니다. 다만 일부 세부 묘사는 외부 관찰자의 과장이 섞여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어요.
Q2. 하자르 통치층이 유대교로 개종한 후에도 일부다처제는 유지되었나요?
네, 유지되었습니다. 통치층의 유대교 개종 이후에도 카간의 하렘은 그대로 존속했어요. 이는 하자르의 유대교 수용이 종교적 신앙과 유목 군주의 정치 관습을 분리해서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됩니다. 즉 종교는 바꿨지만 유목 카간의 통치 의례는 그대로 둔 거죠.
Q3. 비잔틴 황제와 결혼한 하자르 공주가 정말 있었나요?
가장 유명한 사례는 732년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와 결혼한 하자르 공주 치차크(Tzitzak)입니다. 그녀는 세례 후 이레네라는 이름을 받았고, 그 아들이 훗날 황제 레오 4세가 되었어요. 그래서 레오 4세는 “하자르인 레오(Leo the Khazar)”라는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Q4. 하자르 일반 백성의 결혼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종교 공동체별 자치가 핵심이었습니다. 무슬림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유대인은 할라카에 따라, 기독교인은 교회법에 따라 결혼했어요. 수도 이틸에는 종교별로 별도의 재판관이 있어 결혼·이혼·상속 분쟁을 각자의 율법으로 처리했습니다. 카간의 화려한 하렘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이었던 셈이에요.
Q5. 하자르 결혼 풍습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어떤 자료를 봐야 하나요?
1차 사료로는 이븐 파들란의 리살라, 카간 요셉의 답신(Khazar Correspondence), 셰흐테르 편지(Schechter Letter)가 핵심입니다. 다만 1차 사료들이 단편적이고 외부인 시각이 많아, 토머스 누난, 피터 골든(Peter Golden) 같은 현대 연구자들의 논문을 함께 보시는 게 좋아요. 한국어 자료는 아직 제한적이지만, 영어권에서는 khazaria.com 이 1차 사료 번역과 학술 논문을 잘 정리해두고 있습니다.